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 정부 수립 (문단 편집) ==== [[카이로 선언]] ==== 애당초 [[중국]] 방면으로의 대륙 진출을 염두에 두고 가장 먼저 [[조선]]을 합병한 [[일제]]는 [[1931년]] [[9월 18일]]을 기하여 [[만주사변]]을 일으켜 [[만주]]를 완전히 석권하였다.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협력하던 [[미국]]·[[영국]]·[[프랑스]] 등의 국가들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에 경제제재를 경고하며 만주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였다. 그러나 일본은 [[제1차 상하이 사변]], [[열하사변]] 등을 일으키며 계속해서 국제사회의 경고를 무시하였고, 결국 미·영·프와는 어긋나게 된다. 일본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미·영·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[[독일]]과 가까워지기 시작하였고, 마침내 독일·[[이탈리아]]와 함께 [[추축국]]을 결성하였다. 일본은 결국 [[1937년]] [[7월 7일]]에 [[중일전쟁]]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. 만주와 마찬가지로 금방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일본은 생각보다 거센 중국의 항전으로 인한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, 이어서 [[동남아시아]] 방면으로의 진출을 획책하게 되었다. 그러던 와중에 [[독일]]이 [[제2차 세계 대전]]이 일으키는 바람에 같은 추축국인 일본은 미·영·프로부터 사실상의 적국 취급을 받았고, 경제제재와 전략자원의 수출을 금하는 등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. 게다가 [[1941년]]에는 미·영·프·중의 4개국이 일본에 [[석유]]를 포함하여 전략물자의 수출을 봉쇄하면서 전쟁 물자 보급에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. 일본은 지속적으로 미국과의 협상을 벌였지만, 미국은 중국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였고, 중국 점령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일본은 결국 협상을 포기하고, [[1941년]] [[12월 7일]]을 기하여 [[미국]] [[하와이]]의 [[진주만]]에 공습을 감행하며 [[태평양 전쟁]]을 개시한다. 당시 일본은 빠른 속도로 [[동남아시아]]와 [[태평양]]을 석권하여 국제사회의 항복을 받아내고, 일본에 부여된 제재들을 해제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. 실제로 전쟁 초반부에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거의 석권하였으나, 만성적인 물자 보급난과 길어진 전선 등의 악재가 겹치기 시작하였다. 미국·영국·중국·[[소련]]은 [[1942년]] [[1월 1일]]에 연합국 공동 선언을 발표하며 [[추축국]]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하였다. [[1942년]] [[6월 7일]]에는 미국이 [[미드웨이 해전]]에서 승리하며 태평양에서의 판세를 완전히 뒤바꾸었다. 승기를 잡은 미국은 일본이 점령한 지역들을 탈환하기 시작하였고, [[1943년]]에 이르면 이미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[[연합국]]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었다. 이에 루스벨트는 1943년 6월에 미·영·중·소 4개국 정상이 만나 전후 처리를 놓고 회담을 할 것을 제의하였다.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 관계자들은 7월 즈음이 되어서 장제스가 전후 처리 문제로 회담에 참석할 거라는 걸 알게 되었고, 7월 26일에 김구가 장제스를 찾아가서 한국 독립 의제를 거론해 주기를 부탁하였다. 그 이전까지는 한국의 처리를 놓고 미국과 영국 사이에 미·영·중·소 4강의 공동 관리 정도로 이야기가 오갔고, 장제스도 김구와 만나기 전까지는 한국 독립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. 그러나 장제스는 김구와의 만남 이후에 한국의 완전 독립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. 또한 당시에 영국과 소련은 중국이 4강에 끼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기며 급기야 소련은 중국이 회담에 나오면 자신들은 나가지 않겠다며 빠지기까지 했는데, 장제스는 영국과 소련이 중국을 배제하려 하자, 한국 독립을 강하게 밀어붙여 영국의 기를 꺾고 싶어 했다. 마침내 [[1943년]] [[11월 22일]], [[이집트]] [[카이로]]에서 소련을 제외한 [[카이로 회담|미·영·중 3국 정상이 만나게 되었다.]] 다음 날인 [[11월 23일]] 저녁, 미중 정상 간의 만찬이 있을 때,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언급하였다. 루스벨트는 이를 즉각 동의하며 만찬에 동석했던 해리 홉킨스 특별보좌관에게 즉시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그 초안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내용인즉, '''"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노예상태를 기억하고 일본 패망 후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 이 나라가 자유 독립국이 되도록 결의하였다."'''였다. 그러나 당시 [[영국 총리]]였던 [[처칠]]은 그 초안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장제스와 대립하였다. 사실, 영국 입장에서 한국의 독립은 무척이나 껄끄러운 문제였던 것이,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주게 되면, 영국 치하의 식민지들도 전부 독립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. 때문에 당시 영국 정부의 입장은 한국 독립에 대해 최대한 언급을 안 하는 것이었다. 루스벨트 역시 장제스의 말에 일단 동의는 하였으나, 뒤로는 중국의 의도를 상당히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. 장제스가 한국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을 두고 루스벨트는 다음 날 열린 영국과의 합동 참모회의에서 '''"아무래도 쟤네가 일본 대신에 한국을 꿀꺽하려고 하는 것 같다"'''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. 아무튼 중국과 영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에 있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, 결국 미국의 중재 하에 '''"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"'''라는 구절이 '''"적절한 시기에"'''라는 문구로 수정되었고, 거기다 영국 측 주장으로 '''"적절한 절차를 거쳐"'''라는 문구도 추가되었다. 최종적으로 발표된 [[카이로 선언]]에는 "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."로 되어 있었고, 이는 '즉각 독립'에서 '[[신탁통치]]'를 내포하는 뜻으로 바뀐 것이다. 그렇긴 해도, 이 선언을 통해서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논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. [[이승만]]의 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즉각 승인을 요구하기는 했지만,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고 난 후, 임시정부는 "사의를 표한다."는 말을 보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